Korean Hydro & Nuclear power corporation facing “A Nightmare Before Christmas” as nuclear powerplant documents continue to l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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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ackers continue leaking critical internal documents from the KHNP, while threatening to begin “Secondary destruction” unless the investigations are stopped and the powerplants shut down by Christmas. The attackers have already leaked critical documents, including the blueprints of the Gori and Weolseong nuclear powerplants.

The KHNP is under fire for the attacks. They weren’t aware of any compromise until the leaks went public. Furthermore, even after realizing that they were compromised by December 18th, they didn’t release any information about the situation. Previous to the leaks, the KHNP suffered an Advanced Persistent Threat attack which exploited a vulnerability in Haansoft Office’s word processor, resulting in the destruction of a few hard drives. The malware, contained in a malicious email attachment, destroyed the MBR on hard disks and caused the word “Who am I” to be printed on screen after a reboot. This attack was kept from the public until the police investigations began.

It also appears that the KHNP employed poor security practices. Though their network had been airgapped, contractors had been provided with the administrator username and password to their internal network by the KHNP. The attacker may have simply compromised one of the contractors, gaining access to the KHNP’s network with ease.

On December 21st, the KHNP announced that there was no evidence of a “hack”.

The timeline of the leaks is as follows.

Dec.15th 11:41 The attacker(Jenia John) creates a facebook account, which he uses to announce the compromise.

Dec.15th 18:57 the attacker sends off thousands of emails that contain malware from the email address “kdfifj1029@hotmil.com”

Dec.15th 20:01 the first leaks begin. Personal information of the KHNP employees are made public on a new Naver blog under a new Naver account, ‘tlsrk112’.

Dec.16th. The attacker takes to Twitter. The blueprints of the Weolseong and Gori nuclear powerplants are first leaked. The radioactivity evaluation report on residents near the powerplant is also leaked.  Under the Twitter account of “John_kdfifj1029”, the attacker tweets “KHNP Hacked!”, and links to the leaked blueprints. The blueprints are hosted on Dropbox.

Dec.18th. 15:22 The attacker sends an email to ETnews, telling the newspaper to check on his blog for more information about the compromise. He claims to be the head of the Korean branch of an Anti-Nuclear society.

Dec.18th 17:40 ETnews contacts KHNP, asking if the leaks were real. The KHNP only then realizes that they had been compromised. The police is contacted, and investigations begin.

Dec.18th 18:02 “John” posts “a warning to KHNP” to Twitter, and links to the Naver blog. on 18:30, the blog is taken down by the police.

Dec.19th 03:30 The attacker posts more internal documents. The new leaks include the blueprints of the Cooling system valves, screenshots of KHNP’s internal control software such as the K-REDAP, Secret Classification protocol, internal phone lines, and the phone numbers of employees.

Dec.19th The attacker posts another tweet. After claiming that he is a part of the “Who am I” hacker group, he states that “The virus could begin working at any minute”, “I have left no evidence of a breach, so don’t bother looking for it”, “The best Christmas present would be a safe environment without radioactivity”, and “I urge all residents who live near the nuclear powerplants to never come near the powerplants for the next few months”.

Dec.21st The attacker posts another tweet, leaking more information and mocking the kHNP. He states that “more than 100,000 documents are ready to be leaked.”, “investigators, you are working hard. But if you want to investigate, do it properly”, “If you are going to excuse the KHNP, stop the investigation”, “Shut down the 1st and 3rd reactors of the Gori powerplant as well as the 2nd reactor in Weolseong by Christmas. If my demands are not met, I will leak all the documents and begin secondary destruction.”. The leaked information includes the final safety check report on the 3rd and 4th reactors of the Weolseong powerplant, the blueprints for the air conditioning system of the 1st and 2nd reactor of the Gori powerplant and The MCNP version 5 user manual.

sources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2/21/2014122100329.html
http://www.huffingtonpost.kr/2014/12/22/story_n_6363930.html
http://www.etnews.com/20141221000027

2. 제 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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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2.1. 제헌국회의 활동

2.2. 이승만 정부의 초기 행보

2.3. 6.25 전쟁

2.4. 전후 복구의 추진

2.5. 이승만의 정치적 실책

2.6. 경제 악화와 4.19 혁명




2.1. 제헌국회의 활동

5.10 총선으로 제헌국회가 구성됩니다. 이들은 2년의 임기를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됩니다. 보통의 국회의원은 4년 임기이지만, 제헌 국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초기 작업을 한 후 바로 다음 대 의회로 넘겨주라고 임기를 짧게 잡은 거에요. 잠깐 1대 국회의원 구성을 볼까요?

무소속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국민주당 기타
85 55 29 31 200

무소속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아직 정당정치가 확립된 시기는 아니었던 거에요.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이승만 지지세력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입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한국민주당이고요. 이 두 당은 모두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던 세력입니다. 왜 단정 지지파가 이렇게 의석을 많이 차지했을까요?

김구,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는 5.10 총선 참여를 거부했어요. 그러니 중도파는 거의 당선되지 않았던 거죠. 단정 지지 세력들만 선거에 참여했고, 그만큼 많은 의석수를 확보한 겁니다.

어쨌거나 이제 헌법 작성 작업이 시작됩니다. 한민당은 사실상 남한의 정계를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어요. 의석수는 적어도, 한민당은 우익 세력 내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한민당에게 부족한 것은 김구나 이승만처럼 전국적인 지명도를 보유한 인사 뿐이었어요. 그래서 한민당은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적극적으로 끌어모았던 겁니다. 이승만을 국가 수반으로 만들면 한민당이 여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유진오가 헌법 초안을 작성합니다. 헌법 초안은 양원제, 내각책임제, 농지개혁, 주요 기업의 국영화를 얼개로 했습니다. 여기에 한민당도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한민당이 총리감으로 생각했던 이승만 본인이 불만을 토로합니다. 아니, 자기가 총리가 되면 임기 보장도 안되고, 만약 의회 장악에 실패하면 바로 잘리는 것이니, 자기한테 불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여 완성된 헌법은 대통령 중심제, 대통령 간선제(의회에서 선거합니다.), 단원제 의회를 골자로 한 대한민국 헌법이 탄생했어요. 또한, 건국헌법 부칙에는 제헌국회에 한해 친일파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을 호용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습니다.

이 헌법에 따라 제 1대 대선이 진행되고,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됩니다. 당연하게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한민당은 축제 분위기였어요. 우리가 사실상의 킹메이커 아니냐는 겁니다. 한민당 내부에서는 심지어 장관에 누구를 내정할 것인지 논의까지 이루어진 상태였어요.

여기에 이승만이 콧방귀를 뀝니다. ‘이 나라의 대통령은 나다. 나는 한민당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부 각료에서 한민당측 인사를 거의 다 거부했어요. 한 명을 수용했는데, 그마저도 다 제일 한직에 배치해서 한민당을 철저하게 무시합니다. 게다가 사회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힙니다. 가장 강력하게 토지 개혁을 실시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거에요. 한민당은 거품을 뭅니다. 아니, 우리가 대통령까지 만들어 줬더니, 우리가 제일 우려하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혀? 이제 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는 완전하게 틀어집니다. 한민당은 심지어 당명까지 바꿔요. 민주국민당(약칭 민국당)이 됩니다.

남은 임기 동안 제헌 의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첫 정부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이승만 정부의 초기 행보

이승만 정부 수립

이승만 정부는 당장 당면한 문제들이 산더미같았어요. 북한이 전기 공급을 끊으면서 경제도 최악을 달리고 있었고, 좌익들이 국내에 판치고 있어요. 우선은 1948년 4월부터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던 제주 4.3사건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앞서서 저는 제주 4.3 사건은 우리 현대사 최대의 비극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이었어요. 미군정 정책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있었던 시기, 3.1 운동 기념식에서 아이가 친일경찰의 말발굽에 치이는 사건이 일어나요. 제주인들은 격렬하게 항의합니다. 그러자 제주 경찰들은 도민들을 향해 발포했어요.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제주인들은 총파업까지 하면서 이에 대해 저항했어요. 이 때 남로당이 제주인들을 선동했고, 제주인들 중 일부가 무장하고 경찰과 미군정에 저항을 시작합니다. 이제부터 사태가 격화됩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인 무장대가 5.10 총선에 반대하면서 경찰서를 습격해요. 처음에는 미군정과 무장대간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미군 대신 국군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국군 입장에서는 제주인 중 누가 좌익 동조자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이 때쯤되면 무장대는 대부분 한라산자락으로 숨어들었어요. 여기에 극렬한 반공주의자들, 서북청년단이 들어오면서 제주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됩니다. 특히 중산간 마을들이 초토화돼요. 최대 500명 규모의 무장대 토벌을 위해서 학살된 제주 도민이 2만 5천에서 3만 명에 달합니다. 분단과 이념 대립이 불러운 비극이었지요.

4.3 사건 동안의 학살

4.3 사건 동안 이루어진 제주인 학살

4.3 사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승만 정부는 전라도 지역의 부대 중 일부에게 제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당시만 해도 한국 군대에는 좌익 세력들이 많았어요. 박헌영이 월북할 때, 남로당 당원들보고 군대로 스며들어서 기회를 잡아 남한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을 이루라는 지시를 내리고 갔거든요. 이승만도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고, 군대 내의 좌익 세력을 없앨 방도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니 군대 내의 남로당 세력은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로당이 주도하고 있는 제주 무장대를 토벌하래요. 이들은 궁지에 몰렸던 겁니다. 결국 반란을 선택합니다. 여수와 순천의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해서 여순 반란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됩니다만 이승만 정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어요.

아, 군대 내의 좌익 세력을 그냥 냅두면 안되는구나 싶어요. 그래서 대대적인 숙군 작업, 즉 군대 내의 좌익 제거 작업을 단행합니다. 이 때 박정희도 좌익으로 구속됩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친일 경찰의 손에 죽고 나자, 박정희는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으로 남로당에 가입했거든요. 숙군 작업으로 구속되자, 박정희는 남로당 조직원들 이름을 대고, 그 대신 석방됩니다. 나중에 박정희는 6.25 과정에서 전공을 세우고 군대 내 직위를 돌려받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제도 안고 있었어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즉 반민특위가 출범합니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악질 친일파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임무를 맡았어요. 반민특위를 위해서 특별경찰이 조직됩니다. 곧 가장 유명했던 친일파들이 줄줄이 체포됩니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이 잡혀와서 재판을 받습니다. 최린 같은 경우는 재판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를 광화문 앞에서 찢어 죽여라. 그래서라도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라는 말을 남깁니다. 이광수는 반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라는 변명을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민족행위자 체포 장면

반민족행위자 체포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말했지만, 아직 대한민국 경찰과 관료 조직 내에는 친일파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어요. 그런데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 경찰의 대표격인 노덕술이 체포됩니다. 정부 관료들도 대거 체포되기 시작해요. 친일 경찰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합니다. 이승만은 이승만대로 한민당과의 결별 이후 반공주의자들을 지지층으로 결집하다보니 지지자들 중 친일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나갑니다. 이승만은 “친일파라도 일만 잘하면 애국자다”라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반민특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거에요.

자, 이제 반민특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시작됩니다. 일단 반민특위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소장파 의원들이 북한 스파이로 몰려요.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이 일로 정치권에서 반민특위를 지지하는 것이 눈치보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합니다. 말도 안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6월 29일에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고요, 7월 6일에는 반민법이 개정되면서 공소시효가 1년으로 축소됩니다. 반민특위에 대한 사실상의 사형 선고였죠. 반민특위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한 채로 와해됩니다. 이렇게 건국 초기 친일파 청산은 물건너갑니다.

1950년, 제헌 국회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토지 개혁이 실시되기 시작합니다. 농지개혁범이 제정되었습니다. 3정보 이상의 토지는 모두 국가에서 값을 깎아서 매입합니다. 토지 가격은 1년 생산량의 3배로 결정되었고, 토지를 구입한 농민은 20%씩 15년에 걸쳐 토지 가격을 납부하도록 했습니다. 정부에는 당장 돈이 없으니 일단 지주에게는 토지 채권을 나누어줍니다. 이승만 정부는 지주들이 채권으로 은행에 입금을 하거나 기업에 투자해서 토지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지주들은 토지 채권을 헐값에 팔아버렸고, 토지 개혁은 지주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토지 개혁은 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에서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민 중심의 토지 소유를 이루었으며, 6.25 전쟁 당시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에 공헌했다는 의의를 가집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토지 개혁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던 것은 6.25 이후였다는 것은 기억해두세요. 한편으로, 토지 자본의 산업 자본 전환이 좌절되었고, 극빈층 농민들은 토지를 구입하지 못했거나, 구입했다가도 빚 때문에 되팔아야 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주들이 최대한 농지개혁법의 실시를 늦추어서 그 사이에 토지를 매매하는 바람에 토지 개혁 대상 토지가 축소된 점도 한계로 지적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2대 총선이 치뤄집니다. 1대 총선 때와는 달리 이 때에는 중도파들이 대거 참여합니다. 아직도 무소속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번함없지만, 독촉 의원들이 대거 낙선했고, 민국당과 대한국민당이 야당 세력으로 등장합니다. 무소속 의원들도 상당수가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중도파들이에요. 이제 의회 내에 이승만 지지 세력은 입지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얒궂게도, 딱 이 시기에 6.25 전쟁이 시작됩니다.

2.3. 6.25 전쟁

하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아픔을 준 사건을 꼽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6.25를 꼽을 겁니다. 그만큼 아프고, 그만큼 슬픈 역사죠. 여하튼 6.25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봅시다.

6월 25일 전까지 어떤 환경이 조성되었기에 전쟁이 시작되었을까요? 뭐 많이들 들어보신 얘기일 겁니다. 우선, 남한 내에서도 남로당 게릴라 활동이 계속되고 있었어요. 정부 수립 이후에는 미군이 철수합니다. 남북한 모두가 무력 통일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했어요. 남한에서는 북진통일론, 북한에서는 민주화 기지론을 내세웁니다. 여기서 민주화 기지는 북한을 뜻하는 말인데요, 북한을 ‘기지’로 삼아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국외적으로는 소련이 북한과 비밀 조약을 맺어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이 발표됩니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 국무성에서 발표한 반공 방어선이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남한과 대만을 제외시켰어요. 김일성은 이때구나 싶었어요. 지금 남한을 침공하면 미군이 참전할 가능성도 낮아보이고, 무기도 빵빵합니다. 김일성은 믿는 구석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토지개혁이었어요. 북한은 토지를 무상분배했다는 것 기억나시죠? 바로 토지를 무상분배한다고 하면 남한의 인민들을 다 북한 쪽으로 끌어올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던 겁니다.

그래서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대규모 남침을 시작했습니다. 엄청난 기세로 밀고 내려와요. 이 때 이승만은 서울도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미리 서울에서 빠져나와 대전으로 향합니다. 그러면서 라디오를 통해 녹음한 담화를 발표해요. “본인은 끝까지 서울을 사수할 것이다”라고요. 게다가 이승만 대피 이후에는 북한의 남진을 막으려고 한강 철교를 폭파시킵니다. 서울 시민들이 대피할 길을 막아버린 거에요. 이 말만 믿고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서울에 남아 있어요. 그리고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합니다.

인민군의 서울 입성

인민군의 서울 입성

이 때 급하게 UN에 연락이 갑니다. 북한의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은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어요. 바로 UN군 참전이 결정됩니다. 이 때만 해도 아무도 낙동강 전선을 사수할 수 있을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주도에서 최후 방어선을 구축할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삼일간 남진을 멈춥니다. 북한군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서울에 남았던 주요 지도자들을 모으고 있었던 겁니다. 덕분에 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따라 전열을 가다듬었고, 여기를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됩니다. 낙동강에서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듭니다. 이제는 UN군이 참전합니다. 이 때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군사작전지휘권을 UN군에 이양합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맥아더의 지휘 하에 실행됩니다. 순식간에 서울이 수복됩니다. 동시에 낙동강에서도 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이 큰 타격을 받습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됐어요. 서울 수복 이후 UN군과 국군은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남한에서 워낙 큰 타격을 입은지라, 북한의 저항이 미약했기 때문에 북진은 엄청난 속도로 이우어져요. 1950년 11월에는 압록강변까지 진격합니다. 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했어요.

38선 이북으로 진격할 때부터 중국은 계속해서 UN군에 대해 경고를 했어요. 국군이 단독으로 북진을 한다면 그것은 한반도 내부의 내전이므로 중국은 관여하지 않겠지만, 만일 UN군이 같이 북진을 한다면 그것은 국제전이며, 중국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이고 응전하겠다는 것이었어요. 맥아더는 이 경고를 완전히 무시했어요. 1950년 10월 말, 중공군이 참전합니다. 인해전술을 펼치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어요.

중공군

중공군의 인해전술

또다시 전세가 역전됩니다. UN군이 워낙 빨리 후퇴해서 흥남에 있던 일부 병력이 고립돼요. 그래서 흥남 철수 작전을 펼쳐 배편으로 흥남 지역의 군인들과 일부 주민들을 남한으로 대피시킵니다. 이 작전을 배경으로 나온 노래가 ‘굳세어라 금순아’에요.

@굳세어라 금순아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됩니다. 이를 두고 1.4후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UN군과 국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섰고, 1951년 3월 서울을 재탈환합니다. 이 때 맥아더는 중공군을 막기 위해서는 만주에 핵을 투하하고 한반도 연해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리자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중국 본토를 미군이 공격해야한다는 주장까지 펼쳐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고 리지웨이를 임명합니다. 이때부터 전쟁은 완전히 교착상태에 들어가요. 38선을 중심으로 양쪽이 승기를 잡지 못하고 전선이 고정됩니다. 개전부터 이 모든 일이 10개월 안에 일어난 일이에요.

미군, 북한군, 중국군은 모두 계속되는 전쟁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곧 휴전협상이 시작돼요. 이 때 이승만은 홀로 끝까지 휴전 협상을 거부합니다. 끝까지 북진 통일을 주장해요. 관제 데모가 부산에서 일어나는데요, 이 때 구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일 아니면 죽음을” “38선은 없다” 그래서 남한은 빠진 채, 북한, 중국, 미국 삼자간의 휴전협상이 계속됩니다.

휴전협상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포로 송환 문제였어요. 미군측에서는 포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자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에 반해 북한과 중국은 자동 송환을 요구했어요. 이 문제로 2년동안 지루한 협상이 계속됩니다. 그러다가 1953년, 미군측의 제안이 최종적으로 선택됩니다.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들은 제 3국의 포로 송환 위원회에서 처리하기로 한 것이죠. 여기에 군사 분계선 설치, 비무장 지대 설치까지 합의가 됩니다. 이제 휴전 조약 타결이 임박했어요.

이승만은 어떻게든 조약이 체결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어요. 가장 예민한 문제는 포로 송환 문제였으니, 포로 송환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북한 쪽에서 판을 깰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일으킨 것이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사건입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헌병대가 미군이 관리하던 포로 수용소를 공격해서 반공 포로들을 석방한 사건입니다. 미군은 엄청나게 당황했어요. 도와주러 왔는데, 그 나라의 헌병대가 자신들을 공격한 거에요. 실제로 이 때 미국은 이승만 암살작전을 계획하고, 그 총 지휘자로 박정희가 선택되기까지 했어요.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습니다. 박정희라는 이름이 계속 튀어나오죠? 정말 독특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에요. 어쨌건 박정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쿠데타를 처음 배웠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한국전쟁은 끝일 맺습니다. 3년간의 전쟁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활퀴고 갔어요. 남북한 사이에 적대감이 엄청나게 강해졌고, 남북한 양쪽에 독재 체제가 등장합니다. 남한에서는 반공을 위시한 이승만 독재가 나타나고요, 북한에서는 전쟁을 계기로 김일섣의 정치적 라이벌들이 숙청당합니다. 이 때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가 숙청당했어요. 그리고 분단이 장기화되는 계기가 되었죠. 또한, UN군에 넘겨주었던 남한군의 군사작전지휘권은 곧 다시 미국군에 귀속되었습니다.

1. 해방 3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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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1. 해방 직후

1.2. 죄우갈등의 격화

1.3. 단독정부 수립 과정

1945년 8월 15일, 조선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돌았습니다. 그 전날, 라디오를 통한 중대 방송이 있을 것이니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공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면서 라디오를 틀었어요. 그러니까 히로히토 덴노(일왕)이 나와서 이렇게 말해요.

짐은 연합국이 카이로에서 권고한 바를 수용하노라.


아무도 뭔 말인지 몰랐습니다. 대체 카이로에서 권고한 사항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8월 15일 밤은 조용하게 저물어 갔습니다.

그 다음 날, 갑자기 라디오에서 그리웠던 조선말이 흘러나와요.

여러분, 저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안재홍입니다. 어제 방송에 대해 혼란스러우셨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어제 방송으로 이제 우리 조선은 다시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해방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귀를 의심해요. 독립이 되었다고? 일제의 지배가 끝났다고? 드디어, 드디어 대한 독립 만세의 소리가 터져나와요. 사람들은 일장기 위에 색을 칠해서 만든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옵니다. 이렇게 해방은 갑자기 우리에게 왔습니다.

해방으로 출옥하는 독립투사들

해방으로 출옥하는 독립투사들

그러나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답니다.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8월 15일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날

미군과 대한 광복군이 연합해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거든요. 이를 통해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인정받아 강화 회담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그 수 년간의 준비가 물거품이 된 겁니다.

그렇다고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요. 이 땅에 나라를 세워야 하니까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이끄는 정부를 세워야 진짜 독립이 찾아오는 거니까요. 그 생각으로 여운형을 중심으로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이 뭉칩니다. 기존의 조선 건국동맹이 좌우합작의 성격을 가지고 개편돼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됩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우선 일본인의 안전한 탈출을 보장하고 총독부에서 행정권과 치안권을 이양받아요. 후에 인민위원회로 개편이 될 지회들을 전국에 설치하고, 치안대를 설치해서 치안 유지 및 생필품 보급에 주력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자, 이제 국내 상황이 여기부터 어떻게 변해갔는지 살펴봅시다.

1.1 해방 직후

국내 정국은 한동안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주도로 흘러갑니다. 건준은 지부 설치(후에 인민위원회가 됩니다.)를 통해 지방에 행정 조직망을 갖추고,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생필품을 보급해요. 한편으로는 치안대를 설치해서 치안도 갖춥니다. 이 몇 개월 동안 조선은 방금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혼란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가 필요하다며 조선 땅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특히 소련군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훨씬 빨리 들어와요. 일부 부대는 심지어 서울까지 내려옵니다. 이러다가는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될 것 같아요. 미국이 다급하게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을 제안합니다. 소련이 수락하면서, 38선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건준은 ‘건국준비위원회’로 남아서는 미군, 소련군과 협상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국가 선포를 서두릅니다. 그 결과가 인민공화국 선포에요. 그런데 인민공화국 선포 과정에서 건준의 주도권을 좌파가 잡게 되면서, 우파들이 대거 튀어나옵니다. 인공 정부에는 좌파들만 득실득실하게 됩니다. 게다가 미군정이 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건준은 와해됩니다.

미군정은 인공 뿐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만든 모든 국가 조직을 부정했습니다. 즉 임시정부도 정부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거에요. 그렇다고 “미국 나쁜놈들!”이라고 외치지는 말길 바랍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아직 한반도 정세 파악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전혀 모르는 세력들에게 남한의 주도권을 넘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거에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로서는 더 아쉬운 정책이 나와요. 현상유지정책, 즉 친일 경찰과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쓰겠다는 발표… 우리로서는 아쉬울 뿐입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어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도자들이 귀국합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오고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요. 이 때 이승만이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독립촉성중양협의회를 만들고, 김구 등은 한국독립당을 만들어서 활동해요. 그 이전에 국내에 있었던 당은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있고요, 송진우, 김성수 등 지주 세력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이 있어요.

자, 이제 미군정의 정책을 살펴봅시다. 미군정은 자본주의를 한국에 도입하고자 합니다. 우선 공산당 계열이 탄압당합니다. 정판사 사건이라고,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고 기소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조선공산당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불법조직이 되었고, 탄압을 받기 시작합니다.

잠깐 딴소리 좀 할게요. 대표적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원봉도 이 시기에 체포되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이 때 김원봉이 딱 보니까 자기를 고문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노덕술인 겁니다. 일제 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 색출, 고문에 앞장섰던 최악의 친일파, 노덕술이었단 말입니다. 김원봉은 감옥을 나오면서 통곡합니다. 자신이 그렇게도 원했던 해방이 왔는데, 이 땅에 아직도 친일파가 이렇게 활개치고 다니는구나. 심지어 독립운동가를 불법조직의 일원으로 몰아서 고문하는구나. 어찌 눈물이 안나왔겠습니다. 남북협상 당시 김원봉은 북한으로 올라갔다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정판사 사건

정판사 사건 당시 재판 모습

한편,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연고자들에게 유상으로 불하해주기 시작해요. 이 때 이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가 신한공사입니다. 미군정은 또한 모든 시장을 자유화합니다. 일제 시대 말기에 가면 총동원령으로 자유 시장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거든요. 이 때 미곡 시장도 당연하게 자유화되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터져요.

1945 년에 한국은 엄청난 대풍년을 맞아요. 그런데 이 때 악덕 지주들, 일부 상인들(모리배)이 쌀 사재기를 합니다. 쌀값이 폭등해요. 여기에 재외동포들의 귀국으로 쌀이 더욱 부족해지게 됩니다. 미국은 아차 싶습니다. ‘아, 쌀 시장만은 자유화하면 큰일나는거구나’라는 걸 느낍니다. 그 다음 해부터 미곡수집정책이 실시됩니다. 미군정이 정한 가격으로 쌀을 강제매입합니다. 농민들 눈에는 이게 뭐처럼 보였을 것 같아요? 네, 그래요. 일제시대의 공출처럼 보였던 거에요.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민심이 크게 술렁였습니다.

반면 소련은 간접정치를 펼쳐요. 그 결과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과 원래부터 평양에서 세력이 강했던 기독교 계열이 연립정권을 만듭니다. 북한에서는 곧 강력하게 친일파 처벌이 추진됩니다. 친일파 청산에 있어서는 남한보다 북한이 철저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1946년부터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5정보 이상의 토지는 모두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실시되었어요. 이를 계기로 지주, 성직자, 친일파들이 대거 탈북해서 남한으로 들어와요. 이제 지주와 종교 세력이 사라졌죠? 이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주의 계열 주도로 정치가 흘러가게 됩니다.

이제 미국과 소련군은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합니다. 1945년 말부터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었어요. 이것이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입니다. 이 때 결정된 사항이 세가지에요.

신탁통치안

  1.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영,소,중 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이 때 동아일보가 희대의 오보를 냅니다. 다른 내용을 제외하고 “연합국이 한국을 신탁통치하려고 한다! 특히 소련이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더라!”라는 보도를 내는 거에요. 사실 소련은 애초에 한국의 정국이 좌익 주도로 돌아가고 있으니 한국을 즉시독립시키는 것이 유리했어요. 실제로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오보였죠.

동아일보의 보도로 국내는 발칵 뒤집어집니다. 일제 36년만 해도 치떨리는데, 다시 연합국 지배 하로 들어가라고? 미친 거 아냐? 좌우익을 막론하고 이런 반응이 나와요. 모두가 뭉쳐서 반탁 운동을 펼칩니다. 우리 민족 일은 우리가 해결할 거다! 이러면서 말이죠.

그런데 좌익 쪽에서 생각해보니 상황이 조금 이상해요.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할 리가 없거든요. 박헌영은 사람을 모스크바에 파견합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잘못 알려져도 너무 잘못 알려졌던 거에요. 좌익 세력은 실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을 읽어보고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하면 5년에서 신탁 통치 기간은 얼마든지 줄어들 수 있다. 결국 현실적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에 저항하는 것은 힘들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되, 최대한 빨리 정부를 수립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좌익은 찬탁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에 비해 우익 진영은 끝까지 반탁을 주장해요. 단, 각각의 이유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우익 중 대표적인 세력들은 김구계, 이승만계, 한민당계가 있습니다. 우선 김구는 우리 민족 일에 왜 외세가 끼어드느냐며 반대를 합니다. 김구 선생은 첫째도 민족, 둘째도 민족, 셋째도 민족인 분이에요. 그러다보니 우리 일에 외국이 끼어들어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이승만계는 반탁 운동을 정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어요. ‘국민 정서가 반탁으로 쏠려 있고, 사람들 대부분이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줄 아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좌익이 정세를 주도해왔다. 이 기회에 반탁을 밀고 나가면서 좌익을 미친 듯이 까자! 우리가 정세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한민당도 비슷한 입장이었어요. 그래서 이승만계와 한민당계는 반탁 운동을 반소 운동으로 전환해요.

한편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는 우선 정부수립을 한 후 신탁통치를 논의하자고 주장합니다. 일단 신탁통치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정부 수립을 먼저 할 수 있다면, 그 후에 찬탁이든 반탁이든 결정하자는 겁니다.

1.2 좌우갈등의 격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둘러싸고, 좌우 갈등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1946년 3월 1일이 찾아옵니다. 해방 이후 처음 맞는 삼일절이에요. 민족 전체의 축제가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날이에요. 그러나 좌우갈등은 삼일절 기념 행사마저도 갈라 놓습니다. 좌익은 삼일절 기념행사를 열면서 찬탁 대회를 하고요, 우익은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반탁 연설을 쏟아냅니다. 이 때 좌우갈등이 어찌나 심했는지, 친일파들이 반공을 외치면서 애국투사로 둔갑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좌우 갈등이 갈 데까지 간 상황.

이런 상황에서 한국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립니다. 여기에서 미국과 소련이 한 가지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바로 정부수립 논의에 참가할 단체 선정 문제였어요. 미국 입장에서는 남한에 있는 우익 단체들을 다 참여시켜야 합니다. 한국의 공산화는 막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우익단체들은 다 반탁운동을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미국은 신탁통치 찬성 여부와는 관계 없이 모든 정치단체들을 참석시킬 것을 주장합니다. 그에 반해 소련은 최대한 좌익 단체 중심으로 한국 정부를 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마침 좋은 핑곗거리가 보입니다. 반탁하는 단체들은 미소공동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참여시키지 말자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1차 미소공위는 결렬됩니다.

이 때 이승만은 머리를 굴립니다. ‘이미 좌우 갈등은 선을 넘어섰고, 미소 양국이 합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해 보이는군. 그렇다면, 내가 선수를 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이야기하자.’ 잠깐 이승만이라는 사람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이승만은 분명 독립운동가이지만, 김구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김구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민족인 사람이라면, 이승만은 첫째는 반공, 둘째가 민족, 셋째는 권력인 사람이에요.(다분히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정읍 발언이 나오는 겁니다. 이승만은 순회 강연장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요.

국내의 모든 지도자들이 긴장합니다. 가장 우려했던 가능성을 이승만이 공개적으로 들고 나와 버렸거든요. 아무도, 아무도 조국이 분단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미군정도 긴장하게 됩니다. 아직 소련과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을 같이 치른 전우입니다.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깨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미군정은 진작부터 점찍은 지도자감이었던 여운형을 부추깁니다. “야, 너도 한국이 쪼개지는 건 원치 않을 것 아니야, 어떻게든 좌우 갈등을 좀 완화해 봐!” 여운형은 중도 좌파라고 평가받습니다만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였어요. 레닌과 만나 공산당 활동을 했는가 하면, 중국 민족주의자의 대표격인 쑨원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 총리와 개인적인 친분마저 있는 사람입니다. 외모도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말도 잘해서, 여운형을 욕하던 사람도 그를 실제로 만나고 나면 그를 칭송하면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해방 이후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것도 여운형입니다. 그러니 미군정이 차기 한국의 지도자감으로 여운형을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좌우익을 아우를 수 있는 인사였거든요.

연설하는 여운형

연설하는 여운형

우익에서는 김규식이 선택됩니다. 김규식은 중도 우파의 대표격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고, 워낙 고집이 강했던 김구나 너무 뚜렷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과는 다르게,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에 맞추어 행동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이제 여운형,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이 추진됩니다. 이 때 김규식과 여운형은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요. 이들은 냉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냉전으로 동아시아까지 얼어붙는 순간이 오면, 한국의 통일은 물건너간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를 결심하면서 이승만에게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좌우 합작이 독립을 위한 단계라면 독립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겠다.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을 안다. 또 떨어뜨린 후에는 짓밟을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내가 희생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그리고 김규식은 그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참 존경스러운 사람이에요.

미군정의 지원 하에 좌우합작위원회는 활발한 활동을 펼칩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에 참여한 중도파를 중심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임시 의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를 설치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좌우합작을 지원했어요. 좌우합작위원회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들을 세우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좌우합작 7원칙입니다.

좌우합작위원회

좌우합작위원회

좌우합작 7원칙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및 민생문제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것.

4)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것.

7) 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 교통,투표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자세히 읽어보면 좌우익 모두를 끌어들이기 위해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원칙들이라는 것이 눈에 보일 겁니다. 특히 3번 원칙을 보세요. 토지를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으로 걷어들인다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몰수는 사회주의 계열의 주장입니다. 이들은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할 것을 주장했거든요. 그런데 유조건 몰수와 체감 매상은 우익의 주장이에요. 토지 개혁을 해야 한다면, 최소한 보상은 해 주고 가져가라는 거죠. 단, 이렇게 땅을 사고 팔 때 시가를 다 쳐서 받을 수는 없고, 몰수할 때에도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농민에게 판매할 때에도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체감 매상)한다는 겁니다.

좌우합작 7원칙은 대체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익 중 한민당과, 좌익 중 박헌영 등 남로당계는 이 원칙들에 동의하지 않아요. 특히 3원칙이 문제가 됩니다. 한민당은 토지를 ‘몰수’한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한민당은 지주들이 모여서 만든 당이었으니까요. 덧붙이자면 한민당은 친일파 청산을 정부 수립 이후에 하자고 주장해요. 지주들이다보니 일제와 협력한 경력들이 있는 당원들이 있었던 거에요. 박헌영은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이 싫었어요. 공산주의 경제를 건설해야 하는데, 현재 국가 경제를 보면 무상 몰수, 무상 분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거든요. 한편 김구와 이승만은 7원칙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지는 않아요. 결국 좌우합작은 극좌와 극우 양쪽으로부터 외면받고, 여기에 여운형이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좌우합작은 무너지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미소 양국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결렬되고 맙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과 합의는 불가능해 보이고, 한국 내부에서도 좌우가 손을 잡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어요. 미군정은 조선 문제에 대해 입장을 완전히 바꿉니다. 중도파 대신 이승만, 한민당 등의 우익 세력과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에 상정합니다.

1.3 단독정부

이 시기의 한국 역사는 분단을 향해 달려나갑니다. 이 파트에서 우리는 분단의 과정, 그리고 어떻게든 분단을 막아보려는 몸부림의 역사를 목격하게 될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서글픈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이제 해방 공간의 마지막 한 해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UN 총회에서 한반도 문제가 논의됩니다. 이 때 소련은 이 총회에 불참했습니다. 미국이 UN에서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참가해 봤자 남의 잔치에 들러리밖에 안 된다는 계산이 있었던 겁니다. 여하튼 UN 총회는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에 따라 정부를 수립하라는 결의안을 내놓습니다.

여기에 소련은 크게 반발합니다. 북한 인구가 남한 인구보다 훨씬 적은데, 인구비례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사회주의 계열을 그냥 선거에서 지게 만들겠다는 소리 아냐? 안돼! 그래서 소련은 선거 감시를 위해 파견된 UN 한국임시위원단이 38선을 넘지 못하게 막아요.

이제 한반도 문제는 다시 UN으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UN 소총회에서 선거 가능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권고안을 내놓아요. 이에 따라 남한만의 총선이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되게 됩니다.

결국 분단이 기정사실화된 겁니다. 당연히 이를 막으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납니다. 이 때 김구가 전면에 나섭니다. 김구는 민족주의자입니다. 한민족은 당연히 하나의 민족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에요. 이 때 김구가 남긴 유명한 연설이 바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입니다.

삼천만 동포 자매형제여, 지금 나의 하나뿐인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잡고 통일정부를 세우는 일에 공동 분투하는 일이다.

조국이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이 한 목숨 통일제단에 바치겠노라.

나는 통일정부를 세우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해서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겠노라.

김구는 김규식과 손을 잡습니다. 38선을 건너서 김일성을 만나 분단을 막을 일을 논의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원래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제안합니다. 김일성은 지도자들만 만나기보다는 남북한의 모든 사회단체와 정당이 모이는 연석회의를 열자고 제안했어요. 결국 이 두 안이 절충되었고, 남북지도자회의와 연석회의가 둘 다 열리게 됩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요. 딱히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5.10 총선 준비를 멈추지도 않을 것이고, 회의 결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발표를 합니다. 이승만과 한민당도 비슷한 입장이었어요.

그래도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들을 이끌고 38선을 건넙니다. 이 때 합의된 사항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한국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시킬 것.

둘째, 외국군의 철수 이후 모든 사회단체와 정당이 참여한 채로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셋째, 일반(보통), 비밀, 평등 투표의 원칙을 따라 통일 조선 입법 기구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제정된 헌법에 따라 정부를 수립할 것.

넷째, 남한만의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것.

그러나 합의 사항은 정국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미군정은 총선 준비를 멈추지 않습니다. 외국군 철수 요구도 묵살당하고요. 아쉽지만 남북협상은 이렇게 큰 성과 없이 마무리됩니다. 한편 김일성은 남북협상을 이용해서 북한 정부 수립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북한은 남북의 지도자들과 정당들이 합의해서 만들어진 정권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남북협상은 성과는 없고 북한 정권에 선전에 이용만 당했다라고 비판받기도 합니다.

5.10 총선거에 대한 저항은 제주 4.3 사건으로도 터져나옵니다. 4.3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데, 나중에 이승만 정부 부분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김구, 김규식등 남북협상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 준비는 순조롭게 이뤄졌고, 결국 5월 10일 총선이 실시됩니다. 이 5.10 총선거는 분단이 확정된 계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비밀, 평등, 보통선거의 원칙에 따라 치러진 민주적 선거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집니다.

정부 수립 이후의 과정은 다음 포스트에서 다룰게요.

Korean Think tank, IFS : “Preventing Hacking should be a national pri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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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Think tank, IFS : “Preventing Hacking should be a national priority”

 march 20th, 2013

translated from a kukinews.com article

The IFS (The Institute for the Future of State), an influential think tank in Korea, implied that Hacking is a critical national problem, that should be considered a national priority.

On March 20th, the IFS posted a video of a lecture by professor Heung-sun Jang. In this lecture, professor Jang stressed the danger of Hacking, stating that a nation-wide disruption could stem from hacking. The professor suggests that a government wide emergency response plan was necessary to prevent such a situation.

Professor Jang states that ‘hacking is not a simple act of stealing,’ as it causes serious problems in ‘4 aspects, which are national security, national wealth, national order, and national human rights.’ He explained that hacking attacks are almost as dangerous as Nuclear weapons, mentioning a statemet by Kim Jong-un, the young leader of North Korea, that ‘the two prides of the republic are Nuclear weapns, and the hacker unit’.

Professor Jang proposed the establishment of a new anti-hacking government agency, the strengthening of anti-hacking laws, and mandating all ISPs to join anti-hacking insurance. Professor Jang emphasized that the ‘Hacking Problem is a pan-ministry problem, a national level problem, which calls for a thourough understanding.”, explaining why the establishment of a dedicated anti-hacking government agency was necessary. He mentioned the American NSA, and advised that Korea needed a counterpart, a powerful ‘control-tower’ hacking agency under the Presidential National Security Agency.

In addition, professor Jang argued for a government-level investment on cyber technology, the creation of a cyber security fund, the training of white-hat hackers, and the establishment of a ‘national hacker military academy’. He stated that a nation-wide exercise drill against hacking should be established.

Disclamer: I translated this myself, so I apologize for any awkward sentences. Here’s the original article.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7005875&code=11121100

Random Post #8 The Reporter and the Byst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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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ten on television news, video clips of terrible accidents are shown. Many of these videos are shot by ordinary people with their cell phone cameras. When one sees such videos, several questions form in one’s mind. Why aren’t they helping the injured? Why are they just standing there taking videos?

Today, people seem obsessed with reporting what happened. With the advent of smart phones and Social networking services such as facebook, twitter, and youtube, people are eager to share their statuses and what is happening around the,. This does have a positive aspect. During the Jasmine revolution, International media coverage was limited, and the world relied on Twitter to receive news from the battlefields. Sometimes, social networking services are used to return the lost to their families. However, the negative aspect is equally definitive.  When the speech-giver collapsed in the middle of his speech, most people were too busy letting others know what happened to actually get up to the stand and help him. When a traffic accident happens, many people are eager to film the results of the accident with their phones. The same people are less eager to use the same phones to call 911.

Why do people choose to report, not to help, those who are suffering, to the world? Perhaps, it is a slightly different form of the bystander effect. People do not feel obligated to help another when more people are around them, thinking that someone else will probably give help to the suffering. When one is behind a camera, his eyes represent the eyes of hundreds, even thousands, of viewers. One feels entitled to the rights of a reporter, who does not have to intervene in the events that he reports, in any way. This way, the camera may steal our humanity. It divides our sense of duty by the number of viewers. While one plays reporter, in reality, one becomes an irresponsible bystander, refusing to extend a helping hand, as it clamps the camera tightly.

One’s duties and responsibilities are things that only oneself can bear, regardless of the number of ‘Likes’ one would receive on facebook. Lowering the camera, and participating in reality may be difficult, and may even lead to trouble. However, one’s duty of helping others should not, and cannot be overidden by the presence of viewers. Being the bystander cannot be justified by the pretext of acting the reporter.

The Video I was responding to:

Random Post #7 Solving file association issues with chromium in lin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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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laimer: This tutorial is based on Peppermint os, an Ubuntu deriative. I cannot guarantee that this solution will work on a distro that uses a different Kernel.

For those of you who use chromium browser on linux, you may have run into a frustrating issue with file association. Chromium may refuse to open magnet links properly, and may not open your downloaded file with your preferred application. Many LXDE users have complained about this issue.

This happens because xdg-open handles your downloaded files in Chromium. What is xdg-open?

xdg-open is a desktop-independent tool for configuring the default applications of a user. Many applications invoke the xdg-open command internally.

Inside a desktop environment (e.g. GNOMEKDEXfce, etc.), xdg-open simply passes the arguments to that desktop environment’s file-opener application (gvfs-openkde-open, or exo-open, respectively), which means that the associations are left up to the desktop environment. When no desktop environment is detected (for example when one runs a standalone window manager, e.g. Openbox), xdg-open will use its own configuration files.

quoted from the Arch Linux index page

In your case, xdg-open is failing to recognize your desktop environment, and therefore, using its own (highly outdated) set of preferences to open your files.  But there’s an easy workaround for that. xdg-open will respect your set of filetype associations if it thinks you are using  a supported desktop environment. All we need to do is to trick xdg-open into thinking that you are using gnome. Here’s how.

Open up the terminal, and type

sudo leafpad /usr/bin/xdg-open

(replace leafpad with your favorite text editor)

enter your password, and your text editor should show you a long text file. Among its many lines, find this part (searching for detectDE should bring you there).

detectDE()
{
if [x”$KDE_FULL_SESSION” = x”true” ]; then DE=kde;
# …
# …
fi
}

and add a single line, DE=gnome; so that it looks like this;

detectDE()
{
if [x”$KDE_FULL_SESSION” = x”true” ]; then DE=kde;
# …
# …
fi
DE=gnome;
}

   Now open chromium, try clicking on magnet links, or your downloaded files. If they are behaving correctly, and opening in your preferred applications, it’s job done. However, in some cases, like mine, clicking on the files may cause no behavior at all. No applications, no nothing. Don’t panic! This is happening because you don’t have gnome-open or gvfs-open that xdg-open can forward to. All you need to do is to install gnome-open and gvfs-open. So open up the terminal again, and issue the following commands:

sudo apt-get install libgnome2-0

sudo apt-get install gvfs-bin

 

(for non-debian/ubuntu distros, you will have to search for different methods of installing gvfs-open and gnome-open. Sorry. Here’s a site that lists a good deal of .RPMs.)

 

restart chromium, and try clicking on any downloaded file, or any magnet link.

   This should be it. xdg-open would he tricked in to thinking you are using the Gnome desktop, and will forward your files and links to gnome-open and gvfs-open, which respect your default settings.

Please comment if I was of any help to you.

P.S. LXDE is xdg-open supported. However, if you are having this issue, xdg-open is probably failing to recognize your de. In the turorial above, you may add DE=lxde; instead of DE=gnome;. Your default filetype association should be respected. However, magnet links don’t seem to work when you use DE=lxde; .

What is Minj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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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is a nation that is very conscious of its identity. The concept of the Korean race(Minjok) is continually emphasized by many. The Minjok identity helped Koreans to unite under a national impetus of modernization and industrialization during the 1960s to the 1980s. The Media often describes Korean cultural heritages as ‘the cultural heritages of the Korean Minjok’. Until recently, the Korean Ethics textbook stated that Korea was traditionally comprised of a single Minjok, and that we should be proud of that.

Since the Chosun dynasty, concepts that were similar to Minjok had been in use. Concepts such as ‘Dongpo 동포 同胞’, ‘Jokryu 족류 族類’ were in use then . Jokryu was used to differentiate the Koreans with the Japanese, and the northern equestrian Nomads. Dongpo meant ‘the people under the same King’s grace. However, these words were more limited in meaning compared to the modern ‘Minjok’. Towards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the term Minjok was used to describe ‘ethnicity’. Uses such as ‘the white Minjok 백인 민족 are noted.

This changed as the Japanese rule over the Korean empire strengthened. Liang Qichao 梁啓超 introduced a new theory about what Minjok was. He defined Minjok as a group of people who ‘share a common ancestry, reside in the same area, share the same history, share a common religion, and use a common language.’ Along with Minjok, Liang Qichao also defined Gukmin 국민 國民(national citizens) as people from the same Minjok, who share interests , and work together for a common goal. Affected by Liang Qichao’s work, the term Minjok began to be used along with Dongpo to represent the Korean people. As time went on, the Korean Minjok became a group of people who shared the Korean Spirit 조선혼, 민족의 국혼. Shin Chaeho, a contemporary Korean nationalist hisotrian, thought that Minjok was a concept that was beyond simple ‘ethnicity. He thought that Minjok was a group of people who shared a common sense of history, and who would be the central workers in the building of a modern nation. However, during the Japanese colonization period, the idea that Korea was of a single Minjok did not exist.

After the Korean liberation, the idea of the ‘Single Minjok 단일민족 單一民族’ was emphasized. This was in reaction to the trusty ship that the USA and the Soviet Union planned to impose over Korea. Leaders such as Kim Gu stepped forward, proclaiming that the Koreans were of a Single Minjok, and had been over 1300 years. The Single Minjok idea became the rallying point of Koreans who opposed division.

After the Korean division, the concept of Minjok took a different turn in south Korea. The first Korean President, Seung-mahn Lee, proposed the ‘One-people theory’. According to the one-people theory, the Korean minjok were to become a tight community that worked for the general welfare. The blood relationship that forged the Korean Minjok was essential in tying this community together. Naturally, ethnic nationalism began to from in Korea. After the Korean war, the idea of Minjok was suppressed. The Lee Sueng-mahn administration was filled with japanese collaborators, and they used the anti-communism ideology to stifle the concept of Minjok.

It was acutally the democracy fighters who revived Kim Gu’s ideals of Minjok. They merged the idea of Minjok with democratic ideals. Their ideals became known as Korean liberal nationalism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They fought for the restoration of democracy in south Korea, they also fought for Korean reunification, and to get rid of the remains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When the president stepped down, it seemed the ideals of liberal nationalism would be actualized.

All hopes of democracy was let down when the Military staged a coup that unseated the liberal government and built a pacist regime in Korea. Liberal Nationalism was stifled. The Park Jeong-hee administration merged nationalism (the concept of Minjok) with ideals of Industrialization. Nationalism was used as a tool to make people more obedient, and more willing to sacrifice for the Nation. Students were required to memorize the National Educational Bill, which stated that ‘we were born with the historic duty of the Minjok’s revival.’

Through continued protests and struggles, Koreans achieved a hard-fought democracy. With the new democracy, liberal nationalism gained a voice once more. However, along with liberal nationalism , the idea that nationalism was an outdated ideal also rose.

Currrently, the concept of Minjok is a confusing matter. The concepts from Military rule period are mixed with the definition given by the liberal nationalists.

The idea of Minjok went through many trasformations throughout Korean modern history. It has served a variety of purposes, and has benefited the Korean people in many ways.

Today, the debate rages on whether the idea of Minjok is outdated for the globalized world. Certainly, the ‘Single Minjok’ idea seems to conflict with the inflow of foreigners into Korea. Perhaps, the Korean xenophobia that Koreans hold towards foreigners stems from the ‘single Minjok’ ideal.



can Multiculturalism survive along with the Korean Minjok?

Obviously, if the idea of Minjok is confined to a ethnic group connected with blood-relationship ties, it cannot be compatible with multiculturalism. Inadvertently, in this case, the idea of Minjok will lead to the rejection of foreigners, and naturalized Koreans. It would be a different form of racism. It could not co-exist with any modern ideal.

However, over a very long time, the term Minjok has become synonymous with ‘the Korean people’. The idea of Minjok runs deep in the Korean mind. It forms a large part of the national identity. The term of minjok serves an invaluable function of bringing Koreans together. Then, the idea of Minjok must be expanded, rather than abandoned.

Several scholars have suggested the possibility of Open Nationalism. The Minjok should no longer be an exclusive group. The basis of the minjok must be based on equality, human rights, freedom, and democracy. These scholars call for a redefinition of the term Minjok. They claim that the minjok identity will never die away in Korea.

Shin Chaeho suggested that the Minjok was a group that shares a common sense of history, feels a sense of Community, and feels that all members will share a common future. In this definition lies the future of the Korean Minjok. To become a more accepting, open group. The minjok will continue to be an essential part in the Korean ident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