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1. 해방 직후
1.2. 죄우갈등의 격화
1.3. 단독정부 수립 과정
1945년 8월 15일, 조선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돌았습니다. 그 전날, 라디오를 통한 중대 방송이 있을 것이니 모든 사람이 들으라는 공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면서 라디오를 틀었어요. 그러니까 히로히토 덴노(일왕)이 나와서 이렇게 말해요.
짐은 연합국이 카이로에서 권고한 바를 수용하노라.
…
아무도 뭔 말인지 몰랐습니다. 대체 카이로에서 권고한 사항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8월 15일 밤은 조용하게 저물어 갔습니다.
그 다음 날, 갑자기 라디오에서 그리웠던 조선말이 흘러나와요.
여러분, 저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안재홍입니다. 어제 방송에 대해 혼란스러우셨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어제 방송으로 이제 우리 조선은 다시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해방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귀를 의심해요. 독립이 되었다고? 일제의 지배가 끝났다고? 드디어, 드디어 대한 독립 만세의 소리가 터져나와요. 사람들은 일장기 위에 색을 칠해서 만든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옵니다. 이렇게 해방은 갑자기 우리에게 왔습니다.

해방으로 출옥하는 독립투사들
그러나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답니다.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8월 15일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날
미군과 대한 광복군이 연합해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거든요. 이를 통해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인정받아 강화 회담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그 수 년간의 준비가 물거품이 된 겁니다.
그렇다고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지요. 이 땅에 나라를 세워야 하니까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이끄는 정부를 세워야 진짜 독립이 찾아오는 거니까요. 그 생각으로 여운형을 중심으로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이 뭉칩니다. 기존의 조선 건국동맹이 좌우합작의 성격을 가지고 개편돼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됩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우선 일본인의 안전한 탈출을 보장하고 총독부에서 행정권과 치안권을 이양받아요. 후에 인민위원회로 개편이 될 지회들을 전국에 설치하고, 치안대를 설치해서 치안 유지 및 생필품 보급에 주력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자, 이제 국내 상황이 여기부터 어떻게 변해갔는지 살펴봅시다.
1.1 해방 직후
국내 정국은 한동안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주도로 흘러갑니다. 건준은 지부 설치(후에 인민위원회가 됩니다.)를 통해 지방에 행정 조직망을 갖추고,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생필품을 보급해요. 한편으로는 치안대를 설치해서 치안도 갖춥니다. 이 몇 개월 동안 조선은 방금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혼란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말하자면 우리가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가 필요하다며 조선 땅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특히 소련군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훨씬 빨리 들어와요. 일부 부대는 심지어 서울까지 내려옵니다. 이러다가는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될 것 같아요. 미국이 다급하게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을 제안합니다. 소련이 수락하면서, 38선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건준은 ‘건국준비위원회’로 남아서는 미군, 소련군과 협상력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국가 선포를 서두릅니다. 그 결과가 인민공화국 선포에요. 그런데 인민공화국 선포 과정에서 건준의 주도권을 좌파가 잡게 되면서, 우파들이 대거 튀어나옵니다. 인공 정부에는 좌파들만 득실득실하게 됩니다. 게다가 미군정이 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건준은 와해됩니다.
미군정은 인공 뿐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만든 모든 국가 조직을 부정했습니다. 즉 임시정부도 정부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거에요. 그렇다고 “미국 나쁜놈들!”이라고 외치지는 말길 바랍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아직 한반도 정세 파악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전혀 모르는 세력들에게 남한의 주도권을 넘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거에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로서는 더 아쉬운 정책이 나와요. 현상유지정책, 즉 친일 경찰과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쓰겠다는 발표… 우리로서는 아쉬울 뿐입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어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도자들이 귀국합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오고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요. 이 때 이승만이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독립촉성중양협의회를 만들고, 김구 등은 한국독립당을 만들어서 활동해요. 그 이전에 국내에 있었던 당은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있고요, 송진우, 김성수 등 지주 세력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이 있어요.
자, 이제 미군정의 정책을 살펴봅시다. 미군정은 자본주의를 한국에 도입하고자 합니다. 우선 공산당 계열이 탄압당합니다. 정판사 사건이라고,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고 기소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조선공산당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불법조직이 되었고, 탄압을 받기 시작합니다.
잠깐 딴소리 좀 할게요. 대표적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김원봉도 이 시기에 체포되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이 때 김원봉이 딱 보니까 자기를 고문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노덕술인 겁니다. 일제 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 색출, 고문에 앞장섰던 최악의 친일파, 노덕술이었단 말입니다. 김원봉은 감옥을 나오면서 통곡합니다. 자신이 그렇게도 원했던 해방이 왔는데, 이 땅에 아직도 친일파가 이렇게 활개치고 다니는구나. 심지어 독립운동가를 불법조직의 일원으로 몰아서 고문하는구나. 어찌 눈물이 안나왔겠습니다. 남북협상 당시 김원봉은 북한으로 올라갔다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정판사 사건 당시 재판 모습
한편, 미군정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연고자들에게 유상으로 불하해주기 시작해요. 이 때 이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가 신한공사입니다. 미군정은 또한 모든 시장을 자유화합니다. 일제 시대 말기에 가면 총동원령으로 자유 시장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거든요. 이 때 미곡 시장도 당연하게 자유화되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터져요.
1945 년에 한국은 엄청난 대풍년을 맞아요. 그런데 이 때 악덕 지주들, 일부 상인들(모리배)이 쌀 사재기를 합니다. 쌀값이 폭등해요. 여기에 재외동포들의 귀국으로 쌀이 더욱 부족해지게 됩니다. 미국은 아차 싶습니다. ‘아, 쌀 시장만은 자유화하면 큰일나는거구나’라는 걸 느낍니다. 그 다음 해부터 미곡수집정책이 실시됩니다. 미군정이 정한 가격으로 쌀을 강제매입합니다. 농민들 눈에는 이게 뭐처럼 보였을 것 같아요? 네, 그래요. 일제시대의 공출처럼 보였던 거에요.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민심이 크게 술렁였습니다.
반면 소련은 간접정치를 펼쳐요. 그 결과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 계열과 원래부터 평양에서 세력이 강했던 기독교 계열이 연립정권을 만듭니다. 북한에서는 곧 강력하게 친일파 처벌이 추진됩니다. 친일파 청산에 있어서는 남한보다 북한이 철저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1946년부터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5정보 이상의 토지는 모두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실시되었어요. 이를 계기로 지주, 성직자, 친일파들이 대거 탈북해서 남한으로 들어와요. 이제 지주와 종교 세력이 사라졌죠? 이제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주의 계열 주도로 정치가 흘러가게 됩니다.
이제 미국과 소련군은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논의를 시작합니다. 1945년 말부터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었어요. 이것이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입니다. 이 때 결정된 사항이 세가지에요.
신탁통치안
-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다.
-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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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소,중 의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이 때 동아일보가 희대의 오보를 냅니다. 다른 내용을 제외하고 “연합국이 한국을 신탁통치하려고 한다! 특히 소련이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더라!”라는 보도를 내는 거에요. 사실 소련은 애초에 한국의 정국이 좌익 주도로 돌아가고 있으니 한국을 즉시독립시키는 것이 유리했어요. 실제로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미국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오보였죠.
동아일보의 보도로 국내는 발칵 뒤집어집니다. 일제 36년만 해도 치떨리는데, 다시 연합국 지배 하로 들어가라고? 미친 거 아냐? 좌우익을 막론하고 이런 반응이 나와요. 모두가 뭉쳐서 반탁 운동을 펼칩니다. 우리 민족 일은 우리가 해결할 거다! 이러면서 말이죠.
그런데 좌익 쪽에서 생각해보니 상황이 조금 이상해요.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할 리가 없거든요. 박헌영은 사람을 모스크바에 파견합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잘못 알려져도 너무 잘못 알려졌던 거에요. 좌익 세력은 실제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을 읽어보고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하면 5년에서 신탁 통치 기간은 얼마든지 줄어들 수 있다. 결국 현실적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에 저항하는 것은 힘들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되, 최대한 빨리 정부를 수립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좌익은 찬탁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그에 비해 우익 진영은 끝까지 반탁을 주장해요. 단, 각각의 이유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우익 중 대표적인 세력들은 김구계, 이승만계, 한민당계가 있습니다. 우선 김구는 우리 민족 일에 왜 외세가 끼어드느냐며 반대를 합니다. 김구 선생은 첫째도 민족, 둘째도 민족, 셋째도 민족인 분이에요. 그러다보니 우리 일에 외국이 끼어들어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다. 이승만계는 반탁 운동을 정계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어요. ‘국민 정서가 반탁으로 쏠려 있고, 사람들 대부분이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줄 아는 상황이다. 지금까지는 좌익이 정세를 주도해왔다. 이 기회에 반탁을 밀고 나가면서 좌익을 미친 듯이 까자! 우리가 정세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한민당도 비슷한 입장이었어요. 그래서 이승만계와 한민당계는 반탁 운동을 반소 운동으로 전환해요.
한편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는 우선 정부수립을 한 후 신탁통치를 논의하자고 주장합니다. 일단 신탁통치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정부 수립을 먼저 할 수 있다면, 그 후에 찬탁이든 반탁이든 결정하자는 겁니다.
1.2 좌우갈등의 격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둘러싸고, 좌우 갈등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1946년 3월 1일이 찾아옵니다. 해방 이후 처음 맞는 삼일절이에요. 민족 전체의 축제가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날이에요. 그러나 좌우갈등은 삼일절 기념 행사마저도 갈라 놓습니다. 좌익은 삼일절 기념행사를 열면서 찬탁 대회를 하고요, 우익은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반탁 연설을 쏟아냅니다. 이 때 좌우갈등이 어찌나 심했는지, 친일파들이 반공을 외치면서 애국투사로 둔갑하는 일도 흔했습니다. 좌우 갈등이 갈 데까지 간 상황.
이런 상황에서 한국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립니다. 여기에서 미국과 소련이 한 가지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바로 정부수립 논의에 참가할 단체 선정 문제였어요. 미국 입장에서는 남한에 있는 우익 단체들을 다 참여시켜야 합니다. 한국의 공산화는 막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우익단체들은 다 반탁운동을 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미국은 신탁통치 찬성 여부와는 관계 없이 모든 정치단체들을 참석시킬 것을 주장합니다. 그에 반해 소련은 최대한 좌익 단체 중심으로 한국 정부를 꾸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마침 좋은 핑곗거리가 보입니다. 반탁하는 단체들은 미소공동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참여시키지 말자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1차 미소공위는 결렬됩니다.
이 때 이승만은 머리를 굴립니다. ‘이미 좌우 갈등은 선을 넘어섰고, 미소 양국이 합의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단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해 보이는군. 그렇다면, 내가 선수를 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이야기하자.’ 잠깐 이승만이라는 사람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면, 이승만은 분명 독립운동가이지만, 김구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김구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민족인 사람이라면, 이승만은 첫째는 반공, 둘째가 민족, 셋째는 권력인 사람이에요.(다분히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정읍 발언이 나오는 겁니다. 이승만은 순회 강연장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요.
국내의 모든 지도자들이 긴장합니다. 가장 우려했던 가능성을 이승만이 공개적으로 들고 나와 버렸거든요. 아무도, 아무도 조국이 분단되는 것은 원치 않았습니다. 미군정도 긴장하게 됩니다. 아직 소련과 미국은 세계 2차 대전을 같이 치른 전우입니다.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깨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미군정은 진작부터 점찍은 지도자감이었던 여운형을 부추깁니다. “야, 너도 한국이 쪼개지는 건 원치 않을 것 아니야, 어떻게든 좌우 갈등을 좀 완화해 봐!” 여운형은 중도 좌파라고 평가받습니다만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였어요. 레닌과 만나 공산당 활동을 했는가 하면, 중국 민족주의자의 대표격인 쑨원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 총리와 개인적인 친분마저 있는 사람입니다. 외모도 잘생기고, 운동도 잘하고, 말도 잘해서, 여운형을 욕하던 사람도 그를 실제로 만나고 나면 그를 칭송하면서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해방 이후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존경을 받고 있는 것도 여운형입니다. 그러니 미군정이 차기 한국의 지도자감으로 여운형을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좌우익을 아우를 수 있는 인사였거든요.

연설하는 여운형
우익에서는 김규식이 선택됩니다. 김규식은 중도 우파의 대표격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고, 워낙 고집이 강했던 김구나 너무 뚜렷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과는 다르게,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에 맞추어 행동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이제 여운형,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이 추진됩니다. 이 때 김규식과 여운형은 조국의 분단을 막기 위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요. 이들은 냉전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어요. 냉전으로 동아시아까지 얼어붙는 순간이 오면, 한국의 통일은 물건너간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를 결심하면서 이승만에게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좌우 합작이 독립을 위한 단계라면 독립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겠다.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을 안다. 또 떨어뜨린 후에는 짓밟을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내가 희생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그리고 김규식은 그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칩니다. 참 존경스러운 사람이에요.
미군정의 지원 하에 좌우합작위원회는 활발한 활동을 펼칩니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에 참여한 중도파를 중심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임시 의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를 설치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좌우합작을 지원했어요. 좌우합작위원회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들을 세우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좌우합작 7원칙입니다.

좌우합작위원회
좌우합작 7원칙
1) 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한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것.
2) 미국-소련 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것.
3)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여 시가지의 기지와 대건물을 적정처리하며 주요산업을 국유화 하여 사회 노동법령과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및 민생문제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완수에 매진할것.
4)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의 입법기구에 제안하여 입법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서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익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것.
6)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방법, 운영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것.
7) 전국적으로 언론,집회,출판, 교통,투표등의 자유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자세히 읽어보면 좌우익 모두를 끌어들이기 위해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원칙들이라는 것이 눈에 보일 겁니다. 특히 3번 원칙을 보세요. 토지를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으로 걷어들인다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몰수는 사회주의 계열의 주장입니다. 이들은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할 것을 주장했거든요. 그런데 유조건 몰수와 체감 매상은 우익의 주장이에요. 토지 개혁을 해야 한다면, 최소한 보상은 해 주고 가져가라는 거죠. 단, 이렇게 땅을 사고 팔 때 시가를 다 쳐서 받을 수는 없고, 몰수할 때에도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농민에게 판매할 때에도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체감 매상)한다는 겁니다.
좌우합작 7원칙은 대체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익 중 한민당과, 좌익 중 박헌영 등 남로당계는 이 원칙들에 동의하지 않아요. 특히 3원칙이 문제가 됩니다. 한민당은 토지를 ‘몰수’한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한민당은 지주들이 모여서 만든 당이었으니까요. 덧붙이자면 한민당은 친일파 청산을 정부 수립 이후에 하자고 주장해요. 지주들이다보니 일제와 협력한 경력들이 있는 당원들이 있었던 거에요. 박헌영은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이 싫었어요. 공산주의 경제를 건설해야 하는데, 현재 국가 경제를 보면 무상 몰수, 무상 분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거든요. 한편 김구와 이승만은 7원칙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지는 않아요. 결국 좌우합작은 극좌와 극우 양쪽으로부터 외면받고, 여기에 여운형이 극우 청년에게 암살당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좌우합작은 무너지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미소 양국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결렬되고 맙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과 합의는 불가능해 보이고, 한국 내부에서도 좌우가 손을 잡는 것은 불가능해보였어요. 미군정은 조선 문제에 대해 입장을 완전히 바꿉니다. 중도파 대신 이승만, 한민당 등의 우익 세력과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에 상정합니다.
1.3 단독정부
이 시기의 한국 역사는 분단을 향해 달려나갑니다. 이 파트에서 우리는 분단의 과정, 그리고 어떻게든 분단을 막아보려는 몸부림의 역사를 목격하게 될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서글픈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이제 해방 공간의 마지막 한 해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UN 총회에서 한반도 문제가 논의됩니다. 이 때 소련은 이 총회에 불참했습니다. 미국이 UN에서 워낙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참가해 봤자 남의 잔치에 들러리밖에 안 된다는 계산이 있었던 겁니다. 여하튼 UN 총회는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에 따라 정부를 수립하라는 결의안을 내놓습니다.
여기에 소련은 크게 반발합니다. 북한 인구가 남한 인구보다 훨씬 적은데, 인구비례 총선거를 실시하라고? 사회주의 계열을 그냥 선거에서 지게 만들겠다는 소리 아냐? 안돼! 그래서 소련은 선거 감시를 위해 파견된 UN 한국임시위원단이 38선을 넘지 못하게 막아요.
이제 한반도 문제는 다시 UN으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UN 소총회에서 선거 가능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라는 권고안을 내놓아요. 이에 따라 남한만의 총선이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되게 됩니다.
결국 분단이 기정사실화된 겁니다. 당연히 이를 막으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납니다. 이 때 김구가 전면에 나섭니다. 김구는 민족주의자입니다. 한민족은 당연히 하나의 민족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에요. 이 때 김구가 남긴 유명한 연설이 바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입니다.
삼천만 동포 자매형제여, 지금 나의 하나뿐인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잡고 통일정부를 세우는 일에 공동 분투하는 일이다.
조국이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이 한 목숨 통일제단에 바치겠노라.
나는 통일정부를 세우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해서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겠노라.
김구는 김규식과 손을 잡습니다. 38선을 건너서 김일성을 만나 분단을 막을 일을 논의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원래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제안합니다. 김일성은 지도자들만 만나기보다는 남북한의 모든 사회단체와 정당이 모이는 연석회의를 열자고 제안했어요. 결국 이 두 안이 절충되었고, 남북지도자회의와 연석회의가 둘 다 열리게 됩니다.
이에 대해 미군정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요. 딱히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5.10 총선 준비를 멈추지도 않을 것이고, 회의 결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발표를 합니다. 이승만과 한민당도 비슷한 입장이었어요.
그래도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들을 이끌고 38선을 건넙니다. 이 때 합의된 사항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한국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시킬 것.
둘째, 외국군의 철수 이후 모든 사회단체와 정당이 참여한 채로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셋째, 일반(보통), 비밀, 평등 투표의 원칙을 따라 통일 조선 입법 기구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제정된 헌법에 따라 정부를 수립할 것.
넷째, 남한만의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것.
그러나 합의 사항은 정국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미군정은 총선 준비를 멈추지 않습니다. 외국군 철수 요구도 묵살당하고요. 아쉽지만 남북협상은 이렇게 큰 성과 없이 마무리됩니다. 한편 김일성은 남북협상을 이용해서 북한 정부 수립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북한은 남북의 지도자들과 정당들이 합의해서 만들어진 정권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남북협상은 성과는 없고 북한 정권에 선전에 이용만 당했다라고 비판받기도 합니다.
5.10 총선거에 대한 저항은 제주 4.3 사건으로도 터져나옵니다. 4.3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데, 나중에 이승만 정부 부분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김구, 김규식등 남북협상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 준비는 순조롭게 이뤄졌고, 결국 5월 10일 총선이 실시됩니다. 이 5.10 총선거는 분단이 확정된 계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비밀, 평등, 보통선거의 원칙에 따라 치러진 민주적 선거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집니다.
정부 수립 이후의 과정은 다음 포스트에서 다룰게요.